유라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제 2편 - 인류 최초의 문명 유목문화
글과 사진: 이재혁
(사)유라시아 교육원장
유라시아 포럼 회장
【시민시대8-수유라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②】 인류 최초의 문명, 유목문화 - 이재혁 - 인저리타임 (injurytime.kr)
고대 유라시아 평원에 여러분과 같이 서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의 선조들이 집을 짓거나 묘 자리를 정할 때 풍수의 조언을 구했듯이, 유라시아 유목민들도 ‘뭘 좀 아는’ 마을 장로나 집안 어르신의 조언을 따른다. 하늘의 기운과 잘 통하는 바른 풀밭에 중심 기둥을 세우고, ‘보일록’이라는 펠트 천을 나뭇가지들을 따라 두르고, 액운을 물리치는 온갖 성물(聖物), 부적, 장신구, 생활 도구를 천막집 ‘유르타’(중앙아시아) ‘게르’(몽골) ‘춤’(시베리아의 핀란드- 우구르 계, 투르크계 여러 민족의 순록 가죽집)의 안팎에 주렁주렁 걸었다. 생활 주변에서 구한 아름다운 문양과 추상적인 무늬로 가득한 두텁고 화려한 카펫들도 예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000년의 지혜를 자랑하는 카자흐스탄의 유르타 건축 기술,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 키르기스스탄의 쉬르닥 카펫 제작기술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된 인류의 보물들이다. 카펫 제작과 관련한 지식과 기술, 다양성, 장식 패턴을 단숨에 그리고 오려내는 예술적 감수성, 이 모든 것들이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할 그런 고급스런 문화유산인 것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농경민족만 문화민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언제부터 ‘문명’을 이루고 살았을까. 그 최초의 답은 초원에 있다는 게 공부한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가 아닌가 한다. 태초의 문명은 ‘노마드’라고 불리는, 저 떠도는 유목민들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알을 깨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농경민족’ ‘옥토’ ‘세계 4대 문명’ ‘잉여 생산과 계급투쟁’ ‘약탈 경제’ ‘문화 예술의 발달’ 이런 건 훨씬 후대의 일이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한없는 기다림 속에서 사냥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야생의 동물들 새끼를 몰래 훔치거나 주워 와서 손쉽게 고기를 얻고 털을 얻었다. 그것이 디지털 리터러시, 핸드폰 혁명, 제4차 산업, AI 등으로 이어질지 그때 그들이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이 언제부터 동물을 길들이며 살았는지 설이 분분하다. 이 수수께끼에 대해 러시아 포털 사이트 <얀덱스>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개는 1만 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염소와 양과 돼지와 소와 말은 대략 5천 년 전에, 낙타와 고양이와 닭과 오리는 3천~4 천 년 전에 우리 곁에 와서 우리의 가축이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삼국유사>에서 밝힌 대로, 환인의 아들 환웅이 아버지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아래의 신단수로 강림한 사건이 5천 년 전에 벌어진 게 맞는다면, 이 시기에 우리 조상들은 겨우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알았을 것이고 닭백숙이나 오리 불고기는 아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다시 유목민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그들은 한곳에 정착한 삶을 살 수 없었고 가축을 방목하기 위하여 항상 목초지를 찾아다녀야 했다. 지금도 그들의 삶은 바뀐 게 없다고 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은 초원과 반사막지대 그리고 숲을 헤치며 끊임없이 이동하고 이동할 것이다. 사실, 지금이야 유목민 숫자가 전 세계적으로 3천만~4천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대엔 인류의 60%이상이 이런 유목 생활을 했다고 한다. 삶의 현장이 초원이다 보니 초원에 적응하고 초원을 가공하면서 문명을 꽃피울 수밖에 없었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양하지만 한민족의 시원(始原)지 또한 알타이 산맥과 알타이 초원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알타이’는 몽골어로 ‘햇빛이 비치면 산비탈이 황금색으로 변하는 산’, 투르크 어로는 ‘6개의 산’이라는 뜻인데, 몽골-서부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사이에 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6시간 정도 가면 러시아 시베리아의 과학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 공항에 내리고 거기서 다시 몽골 국경으로 3~4백km를 달리면 먼저 초원 알타이가 나오고 이어서 산악 알타이가 나타난다. 필자는 2002년대 초반에 교육부 산하의 ‘아시아 태평양 협회’ 하계 해외봉사단장으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을 20여명 인솔하고 알타이와 서부 시베리아를 6년간 누비고 다닐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막힌 곳이라곤 없는 그 넓디넓은 초원의 천지사방이 붉디붉은 노을로 가득 차는 광경을 목격하고, 아연실색한 경험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태초의 고향 알타이는 그렇게 필자에게 갈 때마다 역사적 문학적 상상과 진기한 경험을 선물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지금의 몽골과 터키의 위치만 보고, 몽골로이드와 투르크 민족을 아예 계통이 다른 상이한 민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몽골 인이나 돌궐인 모두 알타이 산맥의 이쪽저쪽 경사면에 살았던 ‘4촌 간’이 아닌가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 사람들이 자꾸 고향을 등졌고, 그렇게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알타이를 떠나갔다. 멀리 터키까지 흘러갔지만 출발한 풀밭의 경사면은 알타이의 이쪽저쪽이 틀림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든다. 7~8년 전에 동시베리아의 사하공화국에서 동북아문화학회 학술대회가 야쿠티야 북동연방 대에서 열렸다. 그때 평생 한국어의 기원을 찾아 알타이 언어를 공부하신 서울대 이상억 명예교수님이 보이시기에 달려가 나의 이 근거 없는 확신을 들이밀며 교수님의 견해를 여쭤본 적이 있다. 교수님께서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대로 올라가면 몽골과 투르크는 사실 친인척 관계입니다. 어휘가 다소 차이가 날뿐, 고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언어구조도 서로 친족관계이죠. 그 가설이 틀리지 않습니다.” 나는 그날 너무나 기뻐서 정신 줄을 놓을 뻔하였다.
초원에선 말발굽이 울리는 대로 바람이 눕는다. 사람들의 무리도, 역사도, 바람처럼 모였다가 바람처럼 흩어져 버린다. BC 8세기경 흑해 연안에서 북만주까지를 호령하였던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인(페르시아 계)이 그랬고,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그 한나라가 조공을 바치던 BC 3세기의 흉노도 그랬다. 로마제국을 괴롭힌 아틸라와 4~6세기의 훈족(Hun), 선비족, 유연(劉淵), 고구려와 겨룬 투르크계 돌궐족, 10~12세기의 거란족, 여진(말갈) 족, 탕쿠트 족의 나라 서하(西夏), 13세기의 몽골제국, 17~18세기에 몽골 오이라트 족이 세운 마지막 유목국가 준가르 제국도 그렇게 바람의 노래와 함께 사라져갔다.
한편, 포용과 손님환대가 중요한 유목민들에겐 민족국가라거나 국경이라거나 하는 개념은 처음부터 낯선 개념이며, 그들은 나라가 아니라 땅(스탄)에 흩어져 살아간다. 19세기 근대국가 의 출현, 땅에 인위적으로 국경선을 긋는 민족국가의 출현은 그들에게 이산가족의 비극을 잉태하였다. 예를 들어, 카자흐 족의 경우만 봐도 본국인 카자흐스탄에 800만 명, 중국의 신장 위구르 등 서부 중국 170만 명, 북부 우즈베키스탄 110만 명, 남부 러시아 65만4천 명, 투르크메니스탄 13만4천명, 서부 몽골 10만3천명, 키르기스스탄 4만2천명, 이렇게 찢어져서 살게 된 것이다. 그 외에 타지키스탄,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에도 상당수의 카자흐 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이젠 시대가 바뀌어 고대의 유목민이 다시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근대의 역사를 기록한 농경 정주민들이 자신들을 ‘중심부’ ‘문명인’에 두고 유목민들을 ‘주변부’ ‘야만인’으로 홀대했지만 ‘신 노마드’시대를 맞아 이젠 위치가 바뀌었다. 우리도 말로만 ‘노마드’를 외칠 게 아니라 농경 사회 중심적인 낡은 사유를 청산하고, 농경문화 우월의식을 버리거나 가다듬어야 한다. 사실 문화엔 우열이 없고, 오직 삶의 양식(樣式)과 삶을 표현하는 형식에 차이만 있을 뿐 아닌가. 유목민의 화려한 금은 세공 기술, 동물 장식을 보라. 카자흐스탄의 국가 상징인 ‘황금인간’(Golden man),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의 세련된 스키타이 동물 장식들을 만나보시라. 신라 금관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사진은 남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퍼졌던 옛 스키타이 유목민이 남긴 카자흐스탄의 국가상징 ‘황금 인간’
스키타이는 우크라이나의 흑해 연안에서 일어나서 시베리아 남부 초원,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5국을 휩쓸고 동북아시아를 넘어 한반도에 청동 무기와 청동 농기구, 청동제 제기(祭器)기술을 전해 주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누가 알겠는가. 남부 시베리아에서 철기 문명의 절정기를 맞이한 찬란한 스키타이문명이 없었다면 고조선과 부여의 선진문명도 기대하기 어려웠고, 고구려와 발해, 요, 금, 청나라 문명 등도 형성되지 못했을 수 있다. 농경문화의 편견에 갇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지금의 한국 문명을 가능케 한 최초의 문명은 우리가 거칠고 야만스럽다고 매도하는 바로 그 유목 문명일 수 있다! 요컨대, 유목 문명을 이해하고 낯설어하지 않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새 출발하는 시작점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좁은 국수주의에서 벗어나서, 21세기가 요구하는 유라시아 유목민으로 거듭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