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7-유라시아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제1편 - 유라시아 대륙은 과연 어디인가 이재혁 부산외대 교수 / (사) 유라시아 교육원장 / 유라시아포럼 회장 몸도 약하고 키도 작고 영웅호걸 형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면서도 나는 어릴 적부터 비좁은 내 도시, 내 땅이 왠지 답답하고 갑갑하였다. 그때는 시베리아를 공부할 줄 몰랐고, 그냥 나중에 크면 드넓은 초원을 말을 타고 마음껏 달리고 싶었다. 1992년 늦가을쯤인가, 러시아 주재기자 생활을 접고 모스크바대 인문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러시아에 오셨다. 소련 연방이라는 구체제는 무너지고 새 체제는 자리 잡힐 기미가 없고, 어디 가나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손녀 손자가 굶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어 부산에 앉아 편하니 지낼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고구마와 간장통 된장통에 밀가루 봉지까지 바리바리 손에 들고 모스크바 세르메체보 공항에 나타나셨다. 그리곤 며칠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30년이 지나도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30대 중반에 직장까지 관두고 꼬올 좋~다. 어릴 때부터 넓은 데 가서 살고 싶다더니, 소원대로 됐네. 하기야 이리저리 둘러보니까 땅이 넓기는 무지무지 넓구먼. " '유라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시리즈는 바람 거세고, 땅 넓고, 태양이 보라색 지평선을 남기고 누른 초원 너머로 사라지는, 그런 드넓은 유라시아 평원의 이야기이다. 끝을 알 재간이 없는 저 광활한 대륙에서 다양한 언어와 각양각색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울렸던가, 그런 사람살이 얘기다. 페르시아 계의 스키타이와 돌궐의 조상 흉노, 처음엔 그들이 저 대륙의 첫 주인이었지 않았는가. 우리들의 선조들도 그 틈에 끼어 저기서 말갈퀴 휘날리며 초원을 노래하였다. 이런저런 연결망을 따라 결국은 한반도와 하나의 육지로 연결된 그 곳, 어쩌면 우리가 찾는 21세기의 해답들이 저 풀과 바람 안에 있을지 모른다. 21세기 유목민 시대에 저기 저 평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새롭게 열릴 수 있다. 알면 오해와 선입견, 편견과 혐오가 줄어들고 화합과 소통의 장이 열린다고 했던가. 알면 서로 어울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할 수 있다. 그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좁은 민족주의의 울타리에 갇힌 채 그저 영어를 몇 마디하고 신기함을 쫓는 여행만 다녀서는 진정한 ‘세계시민’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유라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는 우리에게 피와 문화를 전해준 북방 이웃들에 대해 그 내면과 그 삶의 무늬를 알아가는 하나의 시도라고 하겠다. 신석기와 청동기 혹은 그 이전부터 그리고 오늘날에 걸쳐 끊임없이, 우리 각자의 삶과 공동체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대하게 영향을 끼치는 우리의 숱한 북방 이웃들, 그들이 걸어온 길과 그들이 품은 다양한 문양에 관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그들을 알아가는 기회를 갖자는 것, 그것이 이번 시리즈의 기획의도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유라시아’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 ‘유라시아’에 대한 시공간적, 역사적, 문화적 정의는 사실 다양하다. 특정 국가나 민족의 입장에 따라 혹은 연구자에 따라 심지어는 이념적 정향定向과 편향성에 따라 ‘유라시아’는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소련과 러시아에선 ‘유라시아’를 러시아 평원과 중앙아시아 5개국으로 한정해서 본다. 서구에서는 ‘유라시아’는 여기에 유럽을 보태기도 하고, 아시아 전체를 ‘유라시아 대륙’에 넣기도 한다. 때로는 몽골, 터키, 발칸반도, 페르시아가 소련과 러시아의 '유라시아'개념에 덧붙여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나와 우리 (사)유라시아 교육원은 이보다는 ‘유라시아’를 훨씬 넓게 이해한다. 유라시아 교육원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우리 사단법인은 북방교류의 종합플랫폼을 자처하며 지난 4월 22일에 수영역 근처에 문을 열었다. 북방교류를 전문으로 하는 민간기관으로선 대한민국에서 설립과 운영이 처음 이루어지다보니까 오랜 심사 끝에 외교부와 부산시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자원이 부족하고 소프트 콘텐츠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이 시대에 바깥과의 네트워킹 아니면 어디서 길을 찾겠는가? 이런 시대적 과제 속에서 유라시아에 관심 있는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북방과 대한민국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 가깝게 연결해보자고 뭉친 것이다. 이런 우리의 입장에선 ‘유라시아’의 시공간을 우리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는 공간으로 확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유라시아 공간’을 태평양과 남중국해 등 대양 너머의 아세안[ASEAN]10개국, 미주대륙, 오세아니아와 남부 아프리카를 제외한 한중일 3국, 몽골,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권, 코카서스, 발칸, 지중해 권, 아라비아와 인도, 동유럽과 서유럽을 포함하는 가장 광의의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그것이 우리 부산과 대한민국이 처한 지정학적 위치와 우리 공동체의 운명에 더 적합한 해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민 시대>의 ‘유라시아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연재물은 우리의 삶 혹은 운명과 직결되는 저 북방 대륙에서, 그 광범위한 유라시아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지 그 속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이해해보고자 하는 행동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모르던 걸 서로 알고 이해하면 그만큼 더 친해질 수 있고 그러면 사랑을 넘어 공동으로 새로운 창조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물에서 다룰 주제와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이번 달 제 1편 ‘시리즈에 들어가며-유라시아 대륙은 과연 어디인가’에 이어 다음 주에 실릴 제 2편에서는 ‘인류 최초의 문명, 유목 문명’을 다루려고 한다. 사실, 농경민족만 문화민족이 아니며, 인류 문명은 초지에서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유목민에게도 우리의 몸에서와 마찬가지로 찬란한 문화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제 3편은 ‘초라한 시작, 장대한 끝’이라는 제목을 단 러시아 제국의 서사이다. ‘슬라브’라는 이름으로 다뉴브 강가에 살던 존재도 없던 한 작은 씨족이 4-5세기에 동북쪽의 산림지대로 이동하면서 삶의 공간이 넓혀졌고 온갖 굴곡의 세월을 거쳐 19세기엔 유럽을 호령하고 문학과 예술대국으로 빠르게 성장해갔지 않은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원초적 힘은 어디에 있는지, 그 1500여 년의 세월과 굴기屈起의 역사를 이 3편에서 다루려고 한다. 4번째 이야기의 모티브는 ‘러시아 대륙에 드리운 몽골의 흔적’이다. 서구는 몽골에게 하도 무지막지하게 당했기 때문에 칭기즈 칸, 바투와 수부타이의 몽골 대군을 야만과 파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만, 세상에 어디 하나의 단면만 있는 진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야만과 파괴와 함께 몽골이 유럽 러시아에 끼친 여러 문명적 요소들도 같은 무게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과거의 그 피비린내 난 전쟁, 숱한 이들이 목숨을 잃은 그 충돌이 아주 헛되게 끝나지 않을 것이며 역사적 진실 또한 다각도로 조망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시각과 태도로 13~15세기의 유라시아 평원을 새롭게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거기서 21세기가 요청하는 융용과 화합, 새로운 문명의 창조라는 습합習合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 5편의 ‘티무르와 아블라이 한’에서는 동로마와 오스만 튀르크 그리고 게르만 지역의 신성로마제국에 밀려 세계사적으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푸른 제국 ‘티무르 제국’의 실체를 마주할 것이고, 광해군처럼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외교를 잘하여 국가와 국민을 무사하게 보존한 카자흐스탄의 군주 ‘아블라이 한’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의 제 6편에서 다룰 제목은 ‘중앙아시아에선 김태희 씨가 정말로 밭을 맬까?’이다. 결론은 ‘그렇다’이다. 미리 전부 이야기해버리면 독자들에게 미안하니까 왜 그런 답이 나오는 지는 조금 기다려 주시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편은 ‘대장 부리바와 우크라이나 코사크 기병대 이야기’로, 독자 여러분들은 할리우드 배우 ‘율 브리너’의 1962년 출세작인 미국 영화 ‘대장 부리바’를 기억하시리라고 본다. 그 이야기와 그 영화 텍스트 속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를 제 7편에서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제 8편은 세계 학생운동, 저항운동의 시발점인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 항쟁과 그 아내들’, 제 9편은 ‘러시아 문학과 문학가 이야기’이다. 화가라고 해서 그냥 화가에만 머물지 않았던 그룹이 있다. 그들은 단순한 ‘그림쟁이’가 아니었고 책임의식이 강한 지독한 지식인들이었으며 ‘세계 구원’의 야망을 품은 실천적 행동가들이었다. 그런 문화패들 이야기를 제 10편의 ‘이동 파 화가와 지식인의 비판 정신’ 편에서 소개하고, 그 다음의 마지막 2편에선 각각 ‘살신성인인가 파멸인가, 소련이 인류에 남긴 것’ ‘광란의 우크라이나 전쟁, 비뚤어진 이념 비뚤어진 지도자’라는 제목으로 소련에 대한 재해석과 현재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참상의 배경을 분석해서 전달하고자 한다. 그럼 이제부터 타임머신에 같이 올라서 고대 유라시아 평원의 유목민 집으로 먼저 들어가 보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