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중앙로365] 앞서간 국제인, 이태준의 고향을 찾아가다 (20250729)
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다음 달 하순에 있을 몽골 방문을 앞두고 경남 함안군 군북면의 ‘대암 이태준 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부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다가 의령에서 빠져 왼쪽으로 가면, 거기서 그렇게 멀지 않다. 이창하 사무국장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몽골을 ‘화류병’으로 불린 국가적 재난에서 구한 신의(神醫) 이태준 선생은 1883년 어느 늦가을에 여기 이 벽촌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생가는 댐 공사로 수몰되고 없었다. 그는 도천재라는 이곳 학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가난과 씨름하며 지내다가, 새로운 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한다. 나라는 을사늑약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이미 스물이 넘은 나이였으며, 고향에 첫 부인과 어린 딸 둘이 있었다. 서울에서 ‘김 형제상회’라는 곳에 일자리를 얻은 이태준은 여기서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학생이던 애국지사 김필순을 만나 운명이 바뀐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다친 대한제국 군인들을 극진히 병원으로 실어 나르고 치료하던 김필순에게서 크게 자극을 받아, 본인도 의사의 길을 택한 것이다.
김필순은 이태준을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소개했고, 안 선생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묻는 젊은 이태준에게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권면할 것을 당부한다. 당시 안창호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일어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의 배후 혐의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도산은 회비까지 당신이 대납해가며 청년 이태준을 신민회의 자매단체 청년학우회에 가입시킨다. 이러던 와중에 1911년 11월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벌였고, 600여 명의 우리 애국지사들이 무더기로 검거된다. 이른바 ‘105인 조작 사건’이다. 마침 중국에선 그해 손문 주도의 신해혁명이 터져, 뜻있는 우리 지사들이 이전의 연해주나 북만주보다는 난징 망명을 선택하던 시기였다. 난징에서 앞날을 도모하던 이태준은 1914년 4월 무렵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김규식과 의논 끝에 몽골에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고륜(지금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으로 향한다. 몽골에선 당시 매독이 퍼져 자칫하다간 국민의 70~80%가 사망할 지경이었다. 대암의 동의의국은 스스로 개발한 의약품으로 이 국민병을 퇴치했고, ‘까우리(고려) 의사’ 이태준은 이내 몽골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몽골의 ‘슈바이처’ 대암은 고륜을 거쳐 가는 숱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고, 임시정부에 수시로 의연금을 냈으며, 임정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로 파견하는 대표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인사회당이 소련의 레닌 정부로부터 확보한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가운데 8만 루블 어치의 금괴를 몽골을 거쳐 중국에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의 고륜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대암은 금괴 운반 과정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자신의 운전사로 일하던 헝가리 출신의 폭발물 제조 전문가인 마자르를 의열단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폭탄 제조기술은 얼마 후에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거나 응징 계획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암은 4만 루블 상당의 나머지 금괴를 베이징으로 옮기려다가 도중에 소련 반(反) 혁명군인 백위파 운게른 일당에게 붙들려 38세의 나이에 희생되고 만다. 겪어봐서 안다. 몽골의 2월은 살인적으로 춥다. 1921년 2월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일본군과 결탁하여 몽골을 장악한 백위파는 동의의국을 약탈하고 대암의 11개월짜리 어린 딸과 하녀도 무참히 살해하였다.
며칠 후면 8월이다. 8월은 광복의 달이다. 100년 전의 한민족은 나라가 없고 지독히 가난했으며, 처지가 지금의 쿠르드족, 집시족, 팔레스타인 민족과 다를 게 없었다. 이태준 기념관을 나오며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그때 그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참 많은 뜻있는 지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곳곳에서 크게 사셨구나 하는 거였다. 대암도 함안에서 서울로, 서울서 난징으로, 난징에서 고륜으로, 거기서 다시 중국의 베이징과 장자커우를 거쳐 고륜으로 숱하게 이동하며 국제인으로 사셨다. 자신과 타자 사이에 구분이 없었다. 8월 하순에 울란바토르에 다시 가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이승 전망대에 다시 오르리라. 그러곤 1913년도 옛 고륜 지도를 펼쳐놓고서 신의(神醫) 이태준이 살았다는 ‘남동 동네’, 1936년 무렵에 몽양 여운형이 대암의 쓸쓸한 무덤을 봤다는 그 산비탈을 마음속으로 찬찬히 다시 더듬어 보리라. 대암의 정신과 삶의 궤적을 거울삼아 나의 삶을 추슬러 보고, 앞으로의 새로운 전망을 다지고, 울란바토르 언덕에 소주 한 잔이라도 붓고 오리라 마음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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