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중앙로365 기고] 유라시아포럼과 사회적 유연성
이재혁 (사)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부산항과 북극항로·글로벌허브도시 등
매년 가을 다양한 주제 정책 방향 도출
하지만 각 영역 담장 높아 공론화 난항
정치·행정·연구자 등 적극적 관심 필요
다른 관점 두루 듣는 문화 활성화해야
공동체 활력 불어넣고 난제 해결할 것

부산시의 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 사업으로 지난해부터 유라시아포럼을 가을에 열고 있다. 2024년의 주제는 ‘글로벌허브 도시 구상과 이민자 도시로서의 부산’ ‘부산항과 북극항로의 현재와 미래’ ‘글로벌 관광 허브 도시로서의 부산의 전략’ ‘부산 다중문화 선진모델의 하나로서의 중앙아시아’ 등 네가지였다. 올해 9~10월의 주제는 ‘외국인을 활용한 지역노동력 확보방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극동의 에너지 정책 변화’였고, 앞으로 ‘우크라이나 복구시장 동향과 우리의 전략’(11월 10일 개최) ‘최근 카자흐스탄과 한국 지자체의 경제협력 추세’(12월 8일 개최)를 남겨놓고 있다.
포럼이란 특정 주제나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여러 영역,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공개적인 대화의 장이다. 유라시아포럼 또한 북방 여러 지역과 부산의 산업계, 경제 단체, 지자체, 학계, 연구계, 시민사회를 연결하기 위한 플랫폼이다. 지역 공동체가 직면한 당면 과제나 시의성 있는 주제를 골라 발제와 토론을 하고, 지역 공동체에 필요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도출하기 위한 자리다. 그런데 행사를 2년째 진행하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 사회 각 영역 간의 담장이 여전히 너무 높고, 사회적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영역과 집단에서 두루두루 모여야 정보가 소통되고 공론화가 이뤄질 텐데, 소통과 교류는 이상일 뿐 실제 현장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북극항로만 하더라도 그렇다. 북극항로 활성화, 북극항로에서의 부산의 주도권을 주장하는 정치인, 고위 관리들, 시민단체, 항만 전문가, 물류 전문가, 공무원, 경제 단체 임원, 공공 연구기관 책임자가 부산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 말대로 북극을 부산의 새로운 발전 동력으로 삼고 북극 시대를 미리 준비하려면 항로의 ‘대주주’인 러시아 정부의 ‘2035 북극 개발계획’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항로는 물류, 항만, 배후지 선진화 문제만이 아니고 항로 ‘주인’의 에너지 정책 변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도 시민 외의 다른 영역에선 전문가의 이런 정보와 조언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러시아 중앙정부의 에너지 수출 정책 변화에 관심을 보인 기관이 없었다.
말하자면, 대형 사회적 관심사에 걸맞은 큰 차원의 조직적, 전략적 접근이 없다는 의미이다. 분야 간, 영역 간의 사회적 유연성이 지극히 떨어진다는 소리다. 이런 고립주의는 사회적 이슈인 외국인 비자 문제 해결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외국인 전문 인력과 노동인구를 잘 활용하여 국가와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는 게 시급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면서도 지역특화형 거주비자(F-2-R) 신청 범위 확대, 인구 감소지역 특화형 E-9-R 비자 신설 및 방문 동거(F-1), 동반(F-3) 체류 자격자의 단순 노무 취업 허용 등의 부문에서 시원하게 해결되는 게 없다. 법무부·노동부·행정안전부·교육부·지자체 등 관련 부처와 기관 간에 협의와 합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직성과 답답함은 최근 부경대에서 열린 부산시 후원의 시민 학술 대회에서도 비슷한 무게로 다가왔다. (사)인본 사회 연구소 주최로 부산 시내 10여 곳의 민간 인문 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이 학술 행사의 올해 대주제는 ‘인공지능(AI)과 세계시민주의’였다. 부산의 초·중등 각급 학교에서도 AI 활용 교육이 널리 강조되고 있고, AI와 부산 경제, AI와 부산의 신산업 생태계를 연결하자는 목소리가 산업계, 연구기관 등에서 얼마나 많은가. 미국의 AI 업계는 스스로 인문학자를 초청, 앞다투어 강연회를 연다고 한다. 그런데 AI와 인문학의 접점과 대안을 모색하는 우리의 학술 발표장에는 시민만 가득할 뿐 업계, 기술계, AI 정책 입안자 등 다른 영역의 사람은 없었다. 지·산·학 협력모델이라는 것도 예산이 대단히 많이 드는 거대 프로젝트 차원의 활성화 전략, 개방형의 공공 연구개발 생태계 구축 등에만 관심을 두고,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산·학 협력을 해나갈지는 관심 밖인 듯하다.
바꿀 수 있다면 마음과 습관 속의 ‘담장 문화’ ‘구역 의식’을 확 낮추고 업계, 지자체, 대학, 연구기관, 민간 영역이 합심했으면 좋겠다. 다른 영역에서 다른 이들은 같은 주제를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다루고, 어디에 어떤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가 있는지, 늘 두루 살피고 참여하는 문화가 제도로 정착되었으면 한다. 사회적 유연성의 일상화, 문화화, 제도화만이 이 복잡한 시대에 우리 공동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각종 난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본다. 출발선이 확보되어야 그 다음의 주행로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중앙로365] 유라시아포럼과 사회적 유연성 (2025.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