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칼럼: 이순신과 러시아(2024.06.09)
- (사)유라시아 교육원 이재혁 이사장
한 달에 한 번 (사)부산여해재단의 ‘이순신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 아내는 5기 졸업생이고 나는 8기이니, 아내가 3년 선배인 셈이다. 21세기에 왜 갑자기 16세기의 이순신이냐 하면, 우선은 세상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고, 그보다는 이순신의 인문정신을 좀 더 찾아내고 심화하여 내가 공부한 저 북방 대륙에 그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다. 김소월의 문학정신과 함께 이순신의 뜨거운 공동체 정신, 애민사상, 평화사상 등을 한국의 문화 가치로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대학 등에 널리 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디넓은 저 북방 대륙, 그곳에도 한류 바람이 거세다. 그러나 그 열기라는 게 대중문화 등 ‘표층’에 편중되어 무엇이 한국의 진짜 정신인지, 무엇이 한국의 진정한 소프트 파워인지 우리 모두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방 대륙 한류 바람 여전하나
가벼운 표층 문화 유행에 그쳐
진짜 한국 정신 전달에는 한계
해외 곳곳 한국학 교육 과정에
애민·헌신의 ‘이순신 정신’ 등
우리 민족 본래 가치 심화해야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최근에 다시 찾은 중세 티무르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 이곳의 외국어대 동양학부에서도 한국어 인기가 갈수록 높아져서 몇 년 새에 판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젠 페르시아어,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 등은 인기 폭발의 우리 한국어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교육 프로그램은 변동이 없다. 한국어 능력 시험 대비 교육, K팝과 드라마, 김밥 타령뿐이다. 고급 문화콘텐츠의 보강 없이 이런 식으로 지금의 한류 붐을 계속 높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이순신의 삶과 사상을 저 광활한 북방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 나를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다. 할 수만 있다면 한산도에 펄럭였던 장군의 통제영 깃발을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코카서스, 러시아, 동유럽에도 펄럭이고 싶다.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1만여 명의 조선 수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의 수륙연합군 본부를 깡그리 박살 낸 부산대첩, 이 위대한 해전의 승전보를 실크로드를 따라 굽이굽이 온 세상에 세세하게 알리고 싶다.
이런 공상 속에 이순신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새롭게 안 사실인데, 러시아와 이순신 장군 사이에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장군은 32세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뒤에 함경도 삼수갑산의 동구비보, 경원 건원보 권관을 거쳐 42세 때인 1586년에 경흥 조산보의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옮겨온다. 조산보는 지금은 러시아 연해주 하산 구역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남북 70리 동서 30리로 여의도보다 훨씬 넓었다는 건너편의 녹둔도에서 장군은 민군 합동으로 거친 갈대를 베어내어 둔전을 만들고, 훗날 한산도대첩에서 빛을 발한 학익진을 맹렬하게 연습했다. 초급장교 시절 이곳에서 장군은 이일이라는 못난 상관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당하기도 했고, 1856년 가을에는 여진족을 뒤쫓다가 적의 화살에 다리를 맞아 많은 피를 흘리기도 했다. 이듬해 초에는 여진족 추장 니응개와 부장 사송이의 시전부락을 급습, 60여 명의 우리 백성을 구해 오기도 했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녹둔도, 이 섬은 이렇게 우리의 영웅과 깊은 인연이 있는 우리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연구와 강연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은 “지금도 녹둔도에 장군의 고귀한 피가 흘러있을 거다. 우리가 이걸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라고 한다.
이순신의 녹둔도를 1860년 러시아는 베이징에서 청나라와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자기 영토로 편입해 버린다. 이른바 우수리강 이남을 차지한 이 ‘베이징 조약’ 덕에 동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1809~1891)는 페테르부르크의 황실로부터 ‘아무르스키’라는 시호를 받았고, 지금도 최고 고액권인 5000루블(한화 7만 5000원 상당) 지폐에 들어가 있다.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공작은 아시아 쪽 러시아를 중시하겠다는 푸틴의 이른바 ‘동방정책’에서 푸틴의 역할 모델이 되는 인물로, 러시아로선 우리의 이순신에 버금가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이순신의 녹둔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돌려받자는 목소리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된다. 영토의 임의 변경을 불허하는 국제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녹둔도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북한과 중국도 러시아와의 쌍무조약으로 녹둔도를 러시아 영토로 오래전에 인정해 버렸다. 우리가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건 영토의 물리적 회복이 아니라, 이순신 정신의 내면화와 국제화일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 한국학 교육에 ‘이순신 정신’ ‘이순신 바로 알기’ 과목을 새로 넣어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및 한국문화 교육에 창발성을 보태는 일, 한국학 교육을 혁신하고 고급화하는 일, 그런 일이 더 중요하고 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