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러시아와의 전쟁 장기화 속
우크라이나 청년들 꿈 좌절
젤렌스키 정권의 편향 외교
비극 촉발시킨 원인의 한 축
우리나라 상황에 반면교사
균형 외교 중요성 명심하길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23세 여성 안나 코시악을 만났다. 안나의 고향은 우크라이나 중남부의 중공업 도시 드니프로다. 그는 우크라이나 난민으로, 바르샤바 SWPS대학 동아시아학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다. 처음부터 난민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4년 전에 폴란드로 유학 온 안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서 중국과 거래하는 모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고국에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와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백야에 물든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노천카페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 고려인 청년 이웃 덕에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는 안나는 “한국 영화에서는 부산이 범죄 도시로 많이 소개되던데, 지금도 부산에 깡패가 많아요?”라고 묻기도 했다. 안나의 소박한 꿈은 유학 온 지 2년 뒤에 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조국 발전에 도움 되기는커녕 돌아갈 집마저 폭격으로 없어진 상태다. 폴란드는 대학 학제가 3년제여서 곧 실습을 마치고 논문을 내면 계속해서 대학에 적을 둘 수도 없다.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 난민을 잘 대해주고 사회적으로도 별다른 차별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남의 땅은 결국 남의 땅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생활고가 만만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 아직 남아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의 안부도 걱정이다. “제 고향은 돈바스나 자포리자 원전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해가 덜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달라요. 전국 어디에나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 폭탄이 떨어져요.”
안나는 바르샤바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밤새워 여기저기 병원을 돌며 의료 폐기물을 수거한다. 하도 험한 일이라 폴란드인들이 꺼려해서 그동안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언어소통 문제 등으로 언제 잘릴지 모른다. 이렇게 어머니가 잠도 못 자고 버는 약간의 돈과 안나가 중국어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받아오는 사례금이 이들 모녀의 수입 전부다. 이 돈으로 숙소 임대료와 전기세 등 공과금을 내고 한 달짜리 정기 교통권을 사면 남는 게 없다. “왜 서유럽처럼 형편이 좋은 다른 나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나는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좀 더 나은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찾아 독일로 떠났어요. 그래도 저같이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여기 폴란드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마도 100만 명은 넘을 걸요?”라고 말했다.
이른바 약소국 정권이 ‘줄타기’ 외교를 잘못하면 나라가 순식간에 거덜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금처럼 장기화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일단 내부 요인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 정부는 2019년 5월 정권을 잡자마자 친서방 편중 외교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1991년 8월 독립 이후 지난 30여 년간 이전 정부가 어렵사리 유지해 왔던 ‘균형 외교’를 일시에 버린 것이다. 결국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대를 안방까지 끌어들여 러시아에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고, 그 결과 지금 이렇게 수년째 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적어도 지난해 ‘6월 대공세’ 실패와 오늘날 상황에 결과적인 책임이라도 지면서 평화협상에 나서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데도 젤렌스키는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며 대통령 임기가 끝났는데도 계속 세계를 돌며 ‘구걸 외교’를 벌이고 있고, 러시아의 내륙 영토로 쳐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항전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태세를 보인다. 그새 민생고 등 우크라이나 내부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고 있다. 방위세를 1.5%에서 5%로 올리고 징수 대상을 확대하면서 올해 112조 원이나 되는 세수 확보를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 친다. 하지만 국가재정은 이미 파탄이 났다. 러시아 쪽도 마찬가지지만, 전쟁 피로감으로 애국주의 물결도 시들해지면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일부 국민은 병무청 앞에 몰려가 불법 징집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다른 데도 아닌 우크라이나 극우 ‘반데라주의’의 본고장인 서부지역 볼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윤석열 정부가 젤렌스키 정부를 닮아가는 건 아닌지 아주 많이 걱정된다. 서울 지하철역에서 독도 조형물이 없어지고, 극우 성향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과 학술기관에 전진 배치되고, 지나치게 미일 해양 편중 외교가 벌어진다. 그러나 대륙과 등지지 말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 1990년대 초의 북방정책 이후 지난 30여 년간 축적된 북방 유라시아 대륙과의 모든 관계망과 자산을 버리고 어디를 향해 가겠다는 건가. 균형 외교만이 살 길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크라이나의 안나 코시악처럼 훗날 미래를 잃고 눈물짓는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